지난 이야기 — 950원 가변저항이 곧 레버였다

맥주 게임기1부에서 이미 게임기가 됐습니다. 레버를 당기면 잔이 차오르고, 손을 놓으면 판정이 뜨고, 10회를 채우면 명예의 전당에 이니셜을 새깁니다. 그런데 그 “레버”의 실체는… 책상 위에 굴러다니는 950원짜리 가변저항이었습니다. 손잡이도 없는 금속 축을 손끝으로 돌리면서 “손맛”을 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부는 그래서 손에 잡히는 것들의 이야기입니다. 레버다운 레버를 만들고, 내친김에 진동 햅틱까지 욕심을 냈습니다. 하나는 성공했고 하나는 실패했는데, 솔직히 실패한 쪽이 더 재미있습니다.

레버 깎는 노인… 대신 Blender AI 파라메트릭 모델링

볼 노브 조작 레버를 레퍼런스로 잡았습니다. 산업 현장에서 흔히 보는, 쇠막대 끝에 동그란 볼이 달린, 기계 옆에 붙어 있으면 당기고 싶어지는 그 물건입니다. 이걸 Blender에 AI를 붙여(MCP) 대화로 모델링했습니다. “허브 지름 16, 로드 85, 볼 24” 하는 식으로 말하면 파라메트릭 스크립트가 자라나는 방식이라, 치수 수정이 대화 한 줄입니다.

구조는 2피스로 갈랐습니다.

  • 레버: 볼 + 로드 + 허브. 허브 구멍이 가변저항의 널링 축에 억지끼움됩니다
  • 기둥: 속에 가변저항이 통째로 들어가는 원기둥. 축만 앞으로 튀어나오고, 배선은 몸통 속 통로를 지나 바닥으로 빠집니다

볼 레버와 가변저항 내장 기둥 — 조립 렌더

겉에서 보면 그냥 “기둥에 레버가 달린 물건”이고, 전자부품은 하나도 안 보입니다. 이게 목표였습니다.

기둥 단면 — 가변저항 포켓과 배선 통로

설계를 뒤집은 사진 한 장

여기까지는 순조로웠습니다. 도면상으로는.

첫 설계는 기둥 뒤에서 가변저항을 터널로 밀어 넣는 방식이었습니다. 포켓 지름도 재고, 배선 통로가 막힌 데 없는지 레이캐스트로 관통 검증까지 했습니다 (실제로 첫 시도에선 통로 중간에 2.5mm 벽이 숨어 있었습니다 — 보이지 않는 내부 통로는 반드시 뚫려 있는지 검증해야 합니다).

그런데 실물 가변저항 사진을 찍어 보내는 순간 모든 게 무너졌습니다.

“가변저항 다리는 그냥 잘라내라는 거야?????”

도면 속 가변저항은 얌전한 원통이었는데, 실물의 단자 다리는 몸통보다 넓게 벌어져 있었습니다. 터널에 들어갈 수가 없는 물건이었습니다. 결국 밀어 넣는 터널 대신 뒤가 뻥 뚫린 격실 + 나사로 잠그는 커버로 재설계했습니다. 서포트 없이 뽑히도록 격실 천장엔 45° 지붕을 얹었습니다.

실물 부품 사진 한 장이 설계를 한 번 뒤집었습니다. 3D 모델링에서 제일 중요한 치수는 화면 속 치수가 아니라 책상 위 부품의 치수입니다.

출력 준비 완료

최종 세트는 세 파일입니다 — 볼 레버, 기둥(v3), 뒷 커버. 메시는 논매니폴드 엣지 0까지 수리해서 슬라이서에 바로 넣을 수 있는 상태로 확정했습니다. 돔과 원통이 만나는 접합부에 미세 구멍이 숨어 있어 한 번 애를 먹었는데, 이런 건 슬라이서에 넣기 전에 잡는 게 백 배 쌉니다.

슬라이서에 올린 최종 세트 — 기둥·볼 레버·뒷 커버

슬라이서에 올린 최종 세트입니다. 기둥은 세우고, 레버는 눕히고, 뒷 커버는 평평하게 — 서포트를 최대한 줄이는 배치입니다. 기둥 옆면의 둥근 구멍이 가변저항 축이 나올 자리입니다.

3D 프린터로 뽑은 레버와 기둥 실물

3D 프린팅은 도면만 봐서는 알 수 없어, 결국 출력해서 손에 쥐어봐야 압니다. 세 파일을 뽑아 가변저항과 결합했습니다.

3D 프린팅한 볼 레버와 기둥 — 조립 완료

출력·조립을 마친 실물입니다. 렌더에서 보던 그 모양 그대로, 손으로 당기면 묵직하게 돌아갑니다. 뒤쪽 24V 파워서플라이는 그날의 공범입니다.

기둥 뒤를 열면 재설계의 결과가 보입니다. 밀어 넣는 터널 대신 뒤가 트인 격실, 서포트 없이 뽑히도록 얹은 45° 지붕, 그리고 받침 아래로 빠지는 배선입니다.

기둥 뒷면 — 가변저항이 들어앉은 격실과 45° 지붕

사진 한 장에 무너졌던 첫 설계의 결말입니다. 다리가 벌어진 가변저항이 이제 편하게 들어앉습니다. 케이블은 기둥 속을 지나 받침 아래로 빠져나옵니다.

레버와 컨트롤러 — 게임기의 입력부가 완성됐다

레버 옆이 이 게임기의 두뇌입니다. 가변저항에서 나온 선이 컨트롤러로 들어가면, 1부에서 만든 그 게임이 이 손잡이로 돌아갑니다.

진동 햅틱 욕심 — “레버를 열면 부르르”

진동 햅틱 욕심은 레버가 생기고 나서 자랐습니다. 맥주를 따르는 동안 레버가 손안에서 부르르 떨리면 어떨까요. 진짜 탭에서 맥주가 흐를 때의 그 미세한 떨림입니다.

마침 컨트롤러에는 아날로그 출력(DA) 확장 보드를 붙일 수 있습니다. 레버를 연 만큼 전압을 올려 보내면 진동도 비례해서 세지는 그림이 바로 그려졌습니다. PLC 로직은 금방 끝났습니다. “따르는 중이면 레버 위치에 비례한 전압을 출력.”

게임기의 컨트롤러 — 메인 보드 옆으로 확장 보드가 나란히 붙는다

게임기의 두뇌입니다. 메인 컨트롤러 옆으로 확장 보드가 레일처럼 붙는 구조라, 레버를 읽는 입력과 진동을 내보내는 출력을 같은 뼈대 위에서 처리합니다.

문제는 진동 소자였습니다. 서랍을 뒤지다 스위치 프로콘(Pro Controller)을 분해해서 적출한 진동 소자를 찾아냈습니다. HD 럼블이라 불리는 그 좋은 진동의 주인공입니다. 이거다 싶었습니다.

기둥 격실에 가변저항과 적출한 진동 소자를 나란히 넣은 모습

격실 안에 가변저항과 프로콘에서 적출한 진동 소자를 나란히 앉혔습니다. 여기까지는, 완벽해 보였습니다.

이게 함정이었습니다.

진동 소자 실패의 연대기 — 원격 진단 기록

진동 소자에 전원을 넣었습니다. 침묵. 전압을 올렸습니다. 침묵. 멀티미터는 분명히 소자 양단에 전압이 걸려 있다고 말하는데, 소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원격 수사극이었습니다. 에디터의 진단 모드로 PLC 메모리에 강제값을 걸어놓고, 현장(이라고 해봤자 옆 책상)에서 멀티미터를 읽으며 한 구간씩 용의선상에서 지워나갔습니다.

  • 보드까지 값이 가는가 → 갑니다 (통신 무죄)
  • 출력 전압이 나오는가 → 나옵니다 (보드 무죄)
  • 소자가 살아 있는가 → 전원을 손으로 빠르게 톡톡 붙였다 떼면 떨립니다 (소자 무죄)

전부 무죄인데 진동만 없습니다. 마지막 실험이 사건을 해결했습니다. 느리게 껐다 켜면 반응이 없고, 빠르게 껐다 켜야만 떨립니다. 그렇습니다, 이 소자는 전압을 유지하면 떨리는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범인: 소자의 정체

프로콘의 진동 소자는 LRA(선형 공진 액추에이터)입니다. 스프링에 매달린 추를 공진 주파수(160Hz 부근)의 펄스로 계속 흔들어야 진동이 나오는 소자로, 게임 컨트롤러 안에서는 전용 드라이버 칩이 그 일을 합니다. DC를 걸면? 추가 한 번 스윽 밀려나고 끝. 그게 제가 본 침묵의 정체였습니다.

ERM vs LRA — 같은 "진동 소자"지만 구동 방식이 다르다

반면 아날로그 출력 보드의 본분은 매끈한 DC 전압을 만드는 것입니다. 내부의 필터가 출렁임을 정성껏 다려서 평평한 전압으로 내보냅니다. 펄스를 넣어달라고 아무리 소프트웨어에서 재주를 부려도, 필터 뒤에서는 다 다려진 DC만 나옵니다. 소자는 펄스를 원하고, 보드는 DC를 줍니다. 둘 다 자기 일을 완벽하게 하고 있어서 안 되는 조합이었습니다.

펌웨어를 세 번 고치고 주파수를 20Hz부터 320Hz까지 훑고 나서야 인정했습니다. 회로에 선 하나만 따면 뚫을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의 규칙은 “제품을 사 온 그대로 조합해서 만든다”입니다. 납땜 개조가 들어가는 순간 “주말에 뚝딱”이라는 이야기가 무너집니다. 그래서 접었습니다.

결말: 소자를 보드에 맞춘다

답은 처음부터 반대편에 있었습니다. ERM 진동모터 — 동전만 한 몸통 속 편심추가 도는, 옛날 휴대폰의 그 진동입니다. 이 소자는 DC 전압에 비례해서 떨립니다. 아날로그 출력 보드와 궁합 그 자체입니다. 레버를 연 만큼 전압이 오르고, 전압이 오른 만큼 세게 떨립니다. 회로 개조 없음, 펌웨어 개조 없음.

적출 부품의 낭만은 버리고 ERM 모터를 주문했습니다. 프로콘 소자는 서랍으로 돌아갔습니다 — 언젠가 전용 드라이버와 함께 다시 만나기로 하고.

3D 프린팅과 진동 소자 선택 교훈

  • 실물 치수가 도면을 이깁니다. 부품 사진 한 장 먼저 찍었으면 설계를 뒤집을 일도 없었습니다.
  • 보이지 않는 통로는 관통 검증. 배선 구멍이든 소켓이든, 뚫었다고 믿지 말고 쏴서(레이캐스트) 확인합니다.
  • “진동 소자”는 한 종류가 아닙니다. LRA는 전용 드라이버가 필요한 소자고, 아날로그 전압에는 ERM이 맞는 소자입니다. 부품 서랍에서 나온 물건일수록 정체부터 확인할 것.
  • 원격 진단은 즐겁습니다. 강제값을 걸고 멀티미터를 읽으며 용의자를 지워가는 과정은, 게임기 만들기에서 제일 설비 정비사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아날로그 DC 출력에는 LRA가 아니라 ERM 진동모터를 골라야 합니다.

다음 편

레버는 이렇게 손에 쥐었으니, 이제 ERM 모터가 도착하면 드디어 떨리는 레버가 됩니다. 거기에 케이스까지 씌우면 이 시리즈의 완성입니다.

▶️ 3부: 맥주 게임기에 블랙잭을 꽂았다 — 게임기가 플랫폼이 되는 순간

🍺 1부를 안 읽었다면: 크랭크를 진짜 레버로 — Playdate 게임 〈Root Bear〉를 PLC·HMI 아케이드 게임기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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